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문단 편집) === [[무장친위대]]가 되다 === [[파일:external/america.pink/2-bronislav-kaminski.jpg|width=100%]] [* 여담으로 이 사진에서 카민스키 왼쪽에 있는 병사 두 명은 독일 국방군이나 슈츠슈타펠 소속이 아닌 [[질서경찰]] 소속 병력들이다. 머리에 질서경찰 특유의 독수리 모표가 달려 있고, 군복 왼쪽 가슴에도 국가수리 문양이 없기 때문이다.] [[1943년]]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이 벨라루스 인근에서 철수하고 소련군의 승리가 이어지자 카민스키는 숱한 위협에 직면했다. 독소전쟁의 승기가 소련으로 기울면서 불안감을 느낀 부대원들이 탈주를 시도하거나 카민스키를 암살하려 여러 차례 시도한 것이다. 카민스키는 원래 진주하던 곳인 브랸스크에서 자신의 고향인 비텝스크 근방으로 부대를 이전했다. [[1944년]]이 되자 카민스키는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포로들,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범죄자, 무장친위대원들을 규합해 부대를 재편하였고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음과 동시에 여단지도자로 승격하였다. 본래 부대 명칭은 "카민스키 특무 여단", 즉 [[카민스키 여단]]이었으나 6월에 SS 무장돌격여단 RONA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었다. 8월에는 <제29 SS 무장척탄병 사단>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샤바 봉기]]가 터지자 카민스키는 부대를 이끌고 [[바르샤바]]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카민스키의 부대는 원래부터 무장은 별 볼일 없었고, 인적 구성도 범죄자가 태반이라 제대로 된 현대전 수행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고 부녀자 강간, 전리품 약탈, 비전투원 학살 같은 일에만 특화되어 있던 부대였다. 카민스키 여단의 막장 실태는 다른 독일군 부대에게도 알려져 사기를 떨어뜨렸고,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도 카민스키를 싫어했는데 그가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를 직접 받는다고 생각하여 바흐-첼레프스키의 명령을 대놓고 항명하는 경우가 적잖았기 때문. 그 탓에 같은 무장친위대 장교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카민스키 여단의 약탈 행위는 힘러에게까지 보고될 정도로 도를 지나친 상황이었다. 원래 약탈품은 모두 힘러에게 가야 했으나 카민스키 여단이 그걸 무시하고 자신들이 모두 착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간인 1만 명을 학살하는 일명 "오코타 학살(Ochota massacre)"을 저질렀다. 이들의 약탈, 강간, 학살 등 범죄행위는 같은 무장친위대도 기겁할 정도로 도가 지나쳤고, 보다못한 [[헤르만 페겔라인]]이 이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히틀러에게 직언을 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